"아니, 엄마. 그건 장아름(가명)이 안 좋아할 것 같아. 그래! 이걸 입고 가자."
그러니까 2년 전. 딸아이에게 '딸 같은' 옷을 입히고 싶은 마음에 저 멀리 외곽으로 가족 나들이를 나갈 때면 나는 어김없이 아웃렛에 들러 아이의 옷을 가득 사곤 했다.
초기 어린이집에 '편한 옷'을 입혀 보내라는 선생님의 당부에 유진이는 15개월 때 등원을 시작한 이후로 줄곧 바지+티셔츠 차림으로 갔는데, 왠일인지 엄마는 유진이가 세 살이 되던 무렵 원피스 같이 ‘여자아이’다운 옷에 꽃혀 귀엽고 깜찍한 느낌의 치마를 사곤 했다.
그러나 아이는 입지 않겠다고 거부했고, 그렇게 엄마는 이쁜 옷에 투자한 자금을 눈으로 즐기는 즐거움으로 회수하지 못하고 '돈을 쓰긴 썼는데 쓴 것 같지 않은' 깊은 시름 속에 놓여 있었다. 여기에 남편에게 경제적 무감각에 대한 쓴소리까지 덤으로 들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엄마는 기왕지사 편한 옷은 유진이의 길고 가는 팔다리가 돋보이는 레깅스와 귀염 뽀짝한 티셔츠를 사는 것으로 대리만족하고 있었다. 유진이도 나름 활동이 편한 옷들을 좋아해서 옷에 대한 불만없이 잘 입고 다녔다.
그런데 언제나 변화의 순간은 급작스럽게 온다는 사실을 이번에 경험하게 됐다. 어느덧 다섯 살이 된 유진이는 어린이집에 샤랄라 원피스를 입고 오는 아이와 '절친'이 되었고, 이왕이면 친구가 하는 모든 것을 자신도 하고 싶어했다.
원피스를 입히면 빨리 벗기라던 아이가 어느새 원피스를 입혀달라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유진이는 여느 여자아이 같지 않게 활동력이 왕성한 자신에게 원피스가 불편한 옷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절친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싶어했다. 더 심각한 것은 절친이 입는 옷들이 원피스의 단계를 넘어선 드레스 수준의 것이라는 점이다.
"엄마, 유진이도 드레스 입고 싶어."
"드레스? 원피스가 이니고?"
"응. 드레스. 넓게 퍼지는 치마 있잖아. 그거 입고 싶어."
"아니. 갑자기? 왜?"
"장아름이 내 옷 안이쁘데."
"엄마는 지금 옷도 이쁘고 좋은데."
"싫어! 싫다고! 드레스!!"
엄마는 얼른 일어나 안입는 옷을 구겨 넣은 옷장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감사하게 물려받은 원피스와 드레스들이 한아름 있었다. 아이는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었다. 아이에게 맞는 사이즈의 옷을 추려내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아, 내일은 장아름에게 옷을 자랑할 수 있겠어! 신난다. 신나!"
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에 엄마는 급작스런 취향의 변화가 아쉬웠다. 나름 돈을 들여 이쁜 옷 잔뜩 사줄 때는 거들떠도 안보더니 이제야 화려한 옷들을 저렇게 찾을 줄이야.
게다가 유진이는 올해 들어 키가 갑자기 커지고 있다. 잠을 잘 자다가도 무릎이 아프다며 깨어 울 정도다. 엄마가 주물러주는 것도 시원찮은지 아이는 일어나 한 시간 내내 아픈 다리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든 경우가 종종 생기고 있다. 지난해 찍은 사진을 보다가 남편과 나는 접어 입히던 옷이 지금은 못 입는 '작은 옷'이 됐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는 성장하고 있었고, 육체의 성장과 함께 취향의 변화도 찾아왔다. 엄마는 서둘러 새로운 드레스를 장바구니에 담기 시작했고, 남편은 일단 드레스를 하나 입혀 보내고 나서 반응을 본 뒤 주문하라는 조언을 잊지 않았다.
7월 중순의 아침. 아이에게 드레스를 입혀주며 주의사항을 전했다. '쉬' 할 때는 옷을 다 들어야 하고, 뛰어 다닐 때는 치마를 잡고 뛰어야 한다는 점 등등. 아이는 듣는 둥 마는 둥 "응. 응. 알았어. 알았다구."라며 귀찮은 듯 대답을 하고는 집을 나섰다.
그런데 여지없이 아이는 7월의 뜨거운 햇빛을 이겨내지 못하고 등원 길 중간부터 땀을 비오듯 흘리기 시작했다. 땀에 젖은 겨드랑이와 허벅지에 드레스 옷깃들이 스치니 귀찮아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집을 나와 원으로 가는 중간 정도 지점에서 "아잇. 이거 불편해. 벗어야 겠어."라며 옷을 벗겨 달라고 난리를 피웠다.
"지금 길거리에서 옷을 벗으면 안돼. 유진이 속바지랑 민소매 속옷 차림으로 원까지 갈꺼야?
"응. 이거 불편해서 더 이상은 못 입겠어. 어서 벗겨줘. 빨리~ 빨리!"
그렇게 왕복 8차선 대로변 건널목 앞에서 유진이는 신이 난 얼굴로 탈의를 했다. 엄마는 고개를 들 수 없어 땅을 바라보고 길을 건너야 했다. 유진이는 다시 변한 맘을 엄마에게 전했다.
"엄마, 그 꽃무늬 원피스 있잖아. 그걸 입고 싶어."
더 이상 길게 쓰진 않겠다. 유진이와 엄마는 집으로 돌아와 화려한 패턴의 꽃무늬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앞선 등원과 달리 평화로운 등원 길에 올랐다. 아이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자신있게 건널목을 건넜다. 게다가 원에서 배운 '길을 건널 땐 손들기'까지 자신감 넘치게 했다.
엄마의 수고 따위는 '남의 일'인 아이는 목표한 바를 달성해서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게 됐다. 게다가 그 원피스는 유진의 '절친'에게도 호평을 받은 모양이다.
아이의 하원을 담당하는 남편은 이후 후일담을 전했다. 아이가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등원하자 절친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멋지다"는 표현을 해줬다는 것이다. 아이도 퇴근한 엄마를 보며 "엄마, 아름이가 내 원피스 이쁘다고 해줬어. 멋있다고 그러고."라는 말을 전하며 기뻐했다.
엄마의 아침 뒷치닥거리가 왠지 보상받는 느낌이어서 더 서글펐다. 지구의 자전이 자연스럽듯 언제나 고생과 고난은 나를 위주로 돌아오기에 허탈한 웃음이 삐죽삐죽 새어 나왔다. 자세히 보니 아이의 옷도 편한 츄리닝 차림으로 바꿔 있었다.
"근데 원피스는 어쨌어?"
"어. 엄마. 원피스도 드레스도 안되겠어. 너무 불편해."
"원피스, 친구한테 칭찬 받았다며."
"응. 그런데 불편해. 친구들도 잡아당기고. 이제 안 입을래."
"엉?"
아이는 드레스는 이뻐서 좋지만 불편하고 원피스는 그나마 편한데 역시나 거추장스럽다는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그러면서 집에서 자신이 원할 때 엄마에게 말하면 입을 수 있으니 그 때 입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장바구니에 한가득 담긴 드레스들은 그날 다 삭제됐다. 그리고 편안하고 캐쥬얼한 느낌의 등원복이 다시 장바구니에 하나 둘 담기기 시작했다. 5살 딸의 비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은 요즘이다.
결혼 전에는 출근 길에 마주하는 어린 아이의 독특한 옷차림을 보고 "엄마가 애 옷을 왜 저렇게 입히지"라고 혀를 차곤 했는데, 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는 것을 체득하게 됐다. 그러니 부디 독특하고 유니크한 감성을 가진 아이의 패션 앞에서 당황하지 마시길. 그리고 그 엄마의 영혼에 안식을 위해 잠시 묵념해 주시길.
비가오는데 장화가 작아서 새로 사야한다고 해서 다시 춘천에 있는 대형마트로 가서 장화코너에 갔는데 분홍빛 이쁜 여자만화 캐릭터 그림이 그려진 장화들은 쳐다도 안보이나봅니다.
공룡을 좋아하는 6살 딸아이는 오늘도 공룡그림장화를 선택했습니다.
하루종일 10시간이 넘게 운전을 해도 피곤한줄 몰랐네요.
딸아이는 내일 어린이집에 신고간다고 공룡그림장화를 꼭 안고 공룡그림 잠옷을 입고 잠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