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TV 브라운관의 주인공은 제약사였다. 안방극장이 시작되기 전, 박카스와 활명수 같은 국민 브랜드들이 광고판을 장악했다. 당시 제약사는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선망의 기업’이자 방송사의 주요 광고주였다.
그러나 의약분업 시대가 열리면서 제약사는 스스로 안방을 떠나 ‘진료실’이라는 전문가의 영역으로 이동했다. 과학적 정밀함을 얻은 대신, 정작 약을 복용하는 ‘사람’과의 거리는 오히려 멀어지는 역설이 발생했다.
그 정점에 있었던 기업이 바로 노보 노디스크다. 비만 치료제 ‘위고비’ 열풍으로 이 회사는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를 제치고 유럽 시가총액 1위에 올랐다. 단순한 제약사를 넘어 ‘노보노믹스(Novonomics)’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덴마크 경제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경쟁사 일라이 릴리가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시장을 파고들 때, 노보 노디스크는 전통적인 영업 방식에 머물렀다. “약이 좋으면 환자가 찾아올 것”이라는 안일함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주가가 반 토막 난 현재, 초콜릿 기업(마즈)과 패션 브랜드(H&M) 출신 임원을 영입하는 모습은 위기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같은 변화는 국내에서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한 ‘환자기본법’은 보건의료 패러다임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환자는 더 이상 수동적인 치료 대상이 아니라 정책의 설계자이자 치료 선택의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여기에 SNS와 인공지능(AI)의 발전은 정보 비대칭을 무너뜨렸다. 환자가 스스로 정보를 탐색하고 자신의 삶에 맞는 치료를 선택하는 ‘환자 주권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제약업계 역시 공급자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뛰어난 효능은 기본이다. 중요한 것은 그 효능이 환자의 일상과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느냐다.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 ‘약’을 파는 기업이 아니라, 환자의 삶을 설계하는 ‘솔루션 파트너’로 변화해야 한다.
중세를 지나 인간 중심의 가치로 회귀했던 르네상스처럼, K-제약·바이오의 미래 역시 ‘사람’에 다시 집중하는 데 있다. 처방전의 권위보다 환자와의 신뢰가 더 중요한 시대. 진정한 부활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 이중백 LG화학 생명과학본부 대외협력파트장은 한국제약바이오헬스 정책전문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