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없으면 꿔서라도 R&D(연구개발)에 투자해야 한다."
고(故)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이 생전에 입버릇처럼 던진 이 말은 한국 제약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선언이었다. 1967년 서울 종로 5가의 작은 약국에서 출발한 그는 다국적 제약사의 제네릭(복제약) 판매에 안주하던 국내 제약업계에 안주하지 않고, 혁신의 길을 걸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택한 그의 뚝심은 2004년 국내 최초의 개량신약 '아모디핀'으로 꽃을 피웠고, 이는 대형 혁신신약 개발을 위한 든든한 캐시카우가 됐다.
하이라이트는 2015년이었다. 한미약품은 독자 플랫폼 기술 '랩스커버리'를 무기로 프랑스 사노피 등 글로벌 빅파마에 총 8조 원에 달하는 역대급 기술 수출 신화를 썼다. 반환과 계약 수정이라는 글로벌 시장의 냉혹한 파고 속에서도 비만·당뇨 치료제 '에페글레나타이드'를 독자 개발로 돌려 국내 상용화를 코앞에 두는 등 집념을 꺾지 않았다.
최근 미국 일라이릴리에 단장증후군 신약 후보물질을 최대 1조 9,000억 원 규모로 기술 수출하며 또 한 번 '잭팟'을 터트린 저력 역시 그 뿌리는 결국 임성기 정신이다.
올해 상반기 K-바이오의 글로벌 기술수출 규모는 벌써 13조 원을 돌파하며 사상 최대 기록을 갈아치울 기세다. 글로벌 빅파마의 특허 만료와 맞물려 K-바이오의 가치가 상한가를 치고 있다.
하지만 조 단위 계약이라는 화려한 숫자에만 취해있을 때는 아니다. 기술반환의 리스크를 이겨내고 신약의 최종 상용화까지 완주하려면 단기 성과에 흔들리지 않는 뚝심이 필수적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본질에 전력투구했던 '임성기 정신'이야말로 세계 제약 강국을 꿈꾸는 K-바이오에 지금 가장 필요한 교훈이다.
* 이중백 LG화학 생명과학본부 대외협력파트장은 한국제약바이오헬스 정책전문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