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보호와 의료진 부담 완화 ‘투트랙’
의료사고 발생 시 환자에게 사고 내용을 설명하도록 하는 의무가 법으로 명문화되고, 필수의료 분야 의료진에 대한 형사절차 특례가 도입된다. 환자 보호를 강화하는 동시에 의료진의 과도한 형사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함께 마련된 것이다.
국회는 23일 본회의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번 개정안은 의료사고 대응체계 전반을 손질하면서 분쟁조정 절차의 신속성과 공정성을 높이고, 필수의료 붕괴 우려에 대응하기 위한 안전장치를 동시에 담았다는 평가다.
설명의무 명문화…“7일 내 사고 경위 설명”
개정안의 핵심은 의료사고 설명의무를 법률로 명시한 점이다. 앞으로 의료기관과 의료인은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환자 또는 보호자에게 사고 내용과 경위를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일정 요건에 해당하는 의료사고의 경우에는 사고를 인지한 날부터 7일 이내에 경위와 사후조치까지 설명하도록 했다.
특히 설명 과정에서 의료진이 표시한 위로·공감·유감의 표현은 민형사상 책임을 인정하는 증거로 사용할 수 없도록 했다. 의료진이 소송 부담 없이 환자와 소통할 수 있도록 장치를 둔 것이다.
이와 함께 일정 의료기관은 의료사고 예방위원회를 운영하고 의료진 대상 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국가는 이러한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행정·재정 지원을 할 수 있다.
사고 이후 피해 회복을 위한 지원체계도 신설된다. 의료분쟁으로 정신적 피해를 입은 환자와 가족 등을 지원하는 ‘의료사고 트라우마센터’가 설치·운영된다.
형사절차 특례 도입…“합의 시 공소제기 제한”
의료진의 형사 부담을 줄이기 위한 장치도 대폭 도입됐다. 개정안은 보건복지부 장관 소속으로 ‘의료사고심의위원회’를 신설해, 해당 의료행위가 고위험 필수의료인지, 중대한 과실이 있는지 등을 판단하도록 했다.
수사기관은 심의가 진행되는 동안 피의자 출석 요구를 자제할 수 있고, 심의 결과는 수사 판단에 활용된다. 사실상 의료사고의 성격을 사전에 걸러내는 장치가 도입되는 셈이다.
형사처벌 특례도 구체화됐다. 의료인이 설명의무를 이행하고 책임보험에 가입한 상태에서 조정이나 합의가 성립되면,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공소를 제기할 수 없도록 했다. 고위험 필수의료행위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의 경우에는 형을 감경하거나 면제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의료기관 또는 의료인이 손해배상금을 전액 지급하거나 보험을 통해 이에 상응하는 보상이 이뤄지면 공소를 제기할 수 없도록 했다. 다만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나 설명의무 위반, 보험 미가입 시에는 이러한 특례가 적용되지 않는다.
책임보험 의무화·보상 확대…제도 전반 재편
배상 책임 구조도 크게 바뀐다. 일정 의료기관은 책임보험 또는 책임공제 가입이 의무화된다. 국가는 보험료 일부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해 제도의 실효성을 높였다.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 범위도 확대된다. 기존에는 분만에 한정됐던 보상 대상이 중증·응급·외상 등 고위험 필수의료 전반으로 넓어진다. 반면 기존 손해배상금 대불제도는 폐지된다.
의료분쟁 조정·감정 체계 역시 대폭 손질된다. 조정위원과 감정위원 규모가 확대되고, 중요 의료사고의 경우 복수 전문가 의견을 의무적으로 반영하도록 했다. 조정 신청 후 상대방이 응답하지 않을 경우 자동으로 조정에 응한 것으로 간주하는 규정도 도입됐다.
조정·감정 결과는 익명 처리 등을 거쳐 공개할 수 있도록 했고, 제도 운영을 점검하는 옴부즈만 제도도 신설된다.
“공포 1년 후 시행”…단계적 적용
이번 개정안은 원칙적으로 공포 후 1년이 지난 시점부터 시행된다. 다만 제도 시행을 위한 준비작업은 사전에 진행할 수 있도록 했다.
의료사고 설명의무는 시행 이후 발생한 사고부터 적용되며, 기존 제도와 충돌하는 손해배상금 대불제도는 시행 이전 청구 건에 한해 종전 규정이 유지된다.
이번 법 개정은 환자 권리 보호와 필수의료 인력 보호라는 상반된 과제를 동시에 풀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만 고위험 필수의료행위의 범위, 책임보험 적용 대상, 형사특례 적용 기준 등은 향후 하위법령에서 구체화될 예정이어서 실제 제도 효과는 세부 설계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